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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10년째 약물로 버틴 남편, 가족의 삶 찾고 싶어요 (근로복지공단 관계자께서 꼭 봐주시기 바랍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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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김소연 | 등록일 | 2018-10-16 | 조회수 | 253 |
오마이뉴스 변창기 기자의 기사를 퍼온 글입니다.
꼭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10년째 약물로 버틴 남편, 가족의 삶 찾고 싶어요" [인터뷰] 현대미포조선 노동자 김석진의 아내 한미선씨 18.10.16 11:37l최종 업데이트 18.10.16 11:37l 변창기(byun21c) '노동자'를 위한 일에 가장 앞장섰음에도 오히려 '노동자'들에게 외면당한, 처음부터 끝까지 '원칙'이 아니면 안 된다는 '노동자'의 이야기. 7년 전 '중등도의 우울증 에피소드'란 병명으로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산재요양승인을 받아 1년 5개월간의 치료를 끝내고 현장으로 복귀한 후 2018년 9월, 과거와 동일한 사유로 재요양승인을 받은 노동자가 있다. 그는 현재 병원을 오가며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이렇게 힘겹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노동자가 바로 현대미포조선에 38년째 다니고 있는 김석진씨다. 내후년이면 예순의 나이를 바라보는 그는 한창 혈기왕성한 20대 후반이었던 1987년, 전국노동자대투쟁 이후 현대미포조선의 제 1대 노조상집부장을 시작으로 노동조합 활동을 해온 장본인이다. 그는 1997년부터 2005년까지 사측의 부당함에 맞서다 부당해고를 당한 이후, 부당해고를 거부하며 8년 3개월간 사측을 상대로 원직복직 투쟁을 했었다. 힘든 여정이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오랜 법정싸움을 이어간 덕분에 사측을 상대로 승소하여 8년 만에 다시 일터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가 지난 세월 현장에서 노동자로 살아온 세월은 굴곡 그 자체였다. 1997년 노조활동을 하다 부당해고를 당했을 때 당시 노동조합 집행부는 해고의 원인을 김 씨 개인의 책임으로 돌렸다. 노동조합을 비롯한 현장의 동료들 조차 그를 외면해 결국 주변의 아무런 도움없이 자비를 들여 해고무효화 소송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런 일을 처음 당해보는 아내와 아직 학교에도 가지 않은 어린 두 딸을 둔 가장에게 지워진 해고라는 짐은 너무나 버거운 것이었다. 그렇게 1997년부터 2005년까지 가족과 함께 버틴 8년의 세월은 참 고생스러웠다. 지난 세월, 그가 노동운동을 하면서 고수했던 것은 '원칙'이었다. 그런 모습에 누군가는 너무 고집스럽다고도 했고, 너무 힘들거라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원칙'이 무너지는 순간, 현장과 노동자의 미래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도 고집스러운 '원칙'을 지킨 덕에 그는 다시 일터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8년 만에 복귀한 현장의 모습은 참담했다고 한다. '민주노조'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고, 현장 노동자의 노동권은 전보다 한참 후퇴한 모습이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그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2007년경 뜻을 함께하는 동료들을 모아 '현장노동자투쟁위원회'를 조직했고 그는 위원회의 대표의장을 맡았다. '현장노동자투쟁위원회'는 민주노조의 결성과 비정규직 노동자문제 해결을 핵심목표로 삼고 활동했었다. 2008년, 현장의 하청노동자들이 원청사용자성 인정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였는데, 당시 그는 사내의 정규직 민주파 현장활동가들과 규합하여 비정규직 연대투쟁에 적극 가담하였다. 그렇게 4개월간의 투쟁 끝에, 사내하청노동자들은 전원 정규직으로 전환되어 현장으로 복귀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었다. 그런데 정작 당시 비정규직 투쟁의 선두에 섰던 김석진씨는 사측으로부터 정직 2개월의 징계와 함께 노동조합으로부터도 5년간의 조합원 권리박탈이라는 중징계를 받게 된다. 그러다 최근 다시 정신적 스트레스로 2차 산재승인이 받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존경하는 선배이기도 한 그와 인터뷰를 한다는 건 그를 더 혹사시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엔 그의 아내를 만나 그간의 사연을 들었다. 지난 6일 만난 한미선씨는 지난 세월을 눈물까지 훔치며 이야기주었다. 다음은 김석진씨의 아내인 한미선씨의 이야기다. - 지난 시간, 남편의 삶은 어땠나요? "남편은 2009년 사내하청노동자들의 복직투쟁을 도운 뒤, 사측으로부터 중징계를 받았어요. 그런데 당시 그 누구보다 지지를 해주어야 할 노동조합까지 투쟁이 끝나자마자 노조대의원대회를 열어 남편에게 5년 간 조합원권리 박탈이라는 중징계를 내렸어요. 그런데 현대미포조선 노동조합은 2017년 노사대상 경총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지난 20년 동안 무쟁의 무분규 사업장으로 선정되기도 했었어요. 그것을 기념하는 기념비석과 기념식수가 회사 정문에 자랑스럽게 세워져 있어요. 이런 걸 보면 남편에게 사측과 노조가 가한 징계수순은 사실상 예견된 일이었을지도 몰라요. 그보다 더 기가 막힌 건 당시 투쟁이 끝난 시점에 남편과 같은 부서의 팀원들이 회사에 막 출근한 남편을 앞에 두고 남편을 비방하는 내용의 현수막을 내보이며 시위를 벌였다는 거예요. 당시 팀원들은 대놓고 남편을 저격하며 '우리 삶의 일터를 망하게 하는 자와는 함께 근무할 수 없다'. '은혜를 원수로 갚느냐' '기만과 거짓… 내 일터 말아먹으려는 자, 당신을 규탄한다' 등의 내용이 담긴 현수막을 내보이며 시위를 했어요. 동료들이 너무 원망스러웠어요. 사내하청 노동자들 복직투쟁 도운 게 잘못인가요? 같은 노동자로서 적극적으로 연대에 동참하지는 못할지라도, 멀리서나마 응원하고 지지해주어야 하는 일이 아닐까요? 정말 황당했어요.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거예요. 당시에 남편 앞에서 시위를 했던 팀원들이 그 때 사용했던 현수막을 남편이 출근하는 현장사무실 주변에 버젓이 걸어둔 거예요. 현장을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다 볼 수 있도록. 당연히 현장 내부에는 현수막이 걸렸다는 소문이 퍼졌고, 많은 조합원들이 퇴근길에 그 현수막을 구경하러 오기까지 했대요. 그뿐만 아니었어요. 남편과 같은 부서의 반총무, 팀총무는 매월 반원들을 대상으로 걷는 반비, 팀비를 받지 않겠다고 했고, 이 때문에 남편은 반 회식, 팀 회식, 연말 송년회, 봄·가을야유회 등의 팀원들과 함께하는 모임에 참여할 수 없게 됐어요. 같은 팀이어도, 같은 팀원 취급 안하겠다는 얘기죠. 이거야 뭐, 다 큰 어른들이 누구의 눈치를 보는지는 몰라도 엄한 사람 왕따를 시킨 거나 다름이 없어요. 팀에서만이 아니에요. 회사에서 아주 대놓고 감시를 하기 시작했어요. 남편이 회사에 출근하면 회사 출입문에서 현장사무실 입구까지 산업보안요원이 뒤를 따라왔다고 해요. 그리고 점심시간에는 현장의 담당 상급자가 따라와서 함께 점심을 먹고, 다 먹을 때까지 지켜보았다고 해요. 이러다 보니 남편은 늘 혼자 점심을 먹었어요. 그리고 현장에서 남편이 누군가와 대화를 하면 대화를 한 사람은 자신의 담당 상급자에게 불려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확인받았다고 해요. 심지어 회사외부에서 감시하기도 했어요. 남편의 동료 팀원과 회사관리자들이 저희 가족이 살던 아파트 앞까지 와서 남편을 감시했어요. 남편이 차를 몰고 집을 나서면 어김없이 감시 차량이 뒤따라 미행을 했어요. 저는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서 마음이 너무 불안했어요. 혹시나 위험한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그래서 아직 중학생, 고등학생이던 두 딸에게 늘 큰길로 다니라고 일렀고, 해지기 전에 빨리 집에 들어오라며 신신당부를 했어요. 살면서 누가 이런 일을 겪겠어요. 난생 처음 겪어보는 일에 가족 모두 불안을 억누르며 보내야 했어요. 특히 가장 직접적으로 고통을 마주해야 했던 남편은 수면장애를 겪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에 따른 두통, 우울증이 생겨서 정상적인 일상이 불가능해졌어요. 그래서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요양을 신청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과 같은 부서의 팀원들 90% 이상이 산재요양승인을 반대하는 서명을 해서 회사를 통해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했어요. 다행히 이후 산재요양승인을 받기는 했지만, 동료들을 향한 배신감, 동료들의 차가운 시선에 겪은 심정적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2011년 12월, 공단으로부터 산재요양승인을 받았고 2013년 4월 종결되었어요. 산재요양종결 이후 시점인 2013년 11월경, 사측은 남편에게 합의서를 들이밀었어요. 회사를 상대로 민·형사상의 청구권리를 포기하라는 요구사항을 제시했고, 그간의 일에 대한 손해배상 및 위자료조로 200만 원을 건넸어요. 이에 남편은 합의서에 나온 내용대로 사측이 앞으로 남편을 탄압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구두로 확인받으며 합의서에 서명을 했어요. 그런데 얼마 못가 결국 이 합의서는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휴짓조각이 되고 말았어요. 현재도 고유업무 배제, 왕따, 폭언은 계속되고 있어요. 지난 사내하청 복직투쟁 연대 이후 남편은 10년 째 자신의 고유 업무를 빼앗겼어요. 본래 남편이 하는 주요 업무는 기계운전 작업인데 완전히 다른 업무를 시켰어요. 이를 테면 녹 제거 작업, 페인트 칠, 청소, 기계 수리 같은 단순작업들이요. 그런데 남편은 현장 근속년수만 벌써 40년 가까이 되는 기술인이에요. 한참 나이 어린 아들 뻘 되는 신입직원들이 현장 일을 배우는 단계에서 담당하는 단순업무를 현장의 고참격인 남편이 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잖아요. 이건 마치 사무실 업무경력 30~40년차의 고참 직원에게 신입사원이 담당하는 문서수발이나 서류복사, 회의록 작성 같은 단순 업무를 주는 것과 같아요. 그러다 보니 남편보다 나이가 어린 현장 상급자가 남편에게 인격모욕적인 발언을 하는 경우도 많았대요. 남편이 휴대폰에 저장해온 녹음 내용을 듣는 순간 추악함에 치가 떨렸어요. 남편은 현장업무에 애착이 많아요. 현장근무라 체력적으로 힘들기는 하지만 어려서부터 일찍이 기술을 배웠어요. 조선소에 입사하기 전에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국제기능경기대회 지역예선에 나가 입상했던 경력도 있고요. 작업에 대한 원칙이 확실하고 기술인으로서의 자긍심도 강해요. 그런데 그렇게 오래 몸담았던 현장에서 이런 대우를 받으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어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남편은 같은 현장에 일하는 동료들과도 편하게 지낼 수 없었어요. 작업 중간, 휴식시간에 남편이 사내하청 노동자와 잠깐 대화를 나누었다는 이유로 부서관리자가 그 사내하청 노동자를 찾아가 앞으로는 남편과 대화하지 말라는 경고를 했대요. 목숨이 위태로울 때도 많았어요. 2011년 산재요양을 시작으로 약물복용을 줄여야 했지만 내성이 생겼는지 꾸준히 복용량을 늘려도 별다른 효과는 없었어요. 병원의 주치의 선생님도 더 이상 복용량을 늘릴 수 없다고 했어요. 주변 환경을 바꾸는 게 최상책이라며 회사를 그만두는 게 가장 좋다고 하셨어요. 남편은 술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약으로 인한 수면장애와 두통이 유달리 심한 날에는 어떻게든 그걸 이겨내려 술을 함께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어요. 그게 대략 1년 전 부터예요. 물론 약과 술을 함께 복용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아요. 하지만 너무 아파하니까요. 어느날, 남편에게 환각증상이 나타났어요. 술과 함께 약을 복용한 날, 한밤 중에 깨어 무의식 상태에서 혼자 집 밖으로 나가 몇 시간을 돌아다니다 집으로 들어온 일이 있었어요. 그것도 몇 번이나. 그래서 저도 새벽에 남편을 찾으러 몇 번이나 나갔어요. 어느 날은 남편을 찾아 동네 주변을 한참 돌다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를 무단 횡단하는 남편을 봤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그런데 더 무서운 건, 남편이 아침에 일어나서 지난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전혀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런 일을 몇 번 겪고 나서 남편이 한밤 중에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아파트 현관문에다 자물쇠를 하나 더 설치했어요. 요즘 남편은 산재재요양승인 후 약물은 그대로 복용하고 있지만 이전처럼 술과 함께 먹지는 않아요. 그나마 다행이죠. 지난 2008년의 투쟁 이후 남편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이 망가졌어요. 2008년의 투쟁 이전, 남편은 자신의 뜻에 따라 진보정치활동의 일환으로 지역의 지방선거(시의원)와 총선(국회 비례대표)에 출마하는 등 대외적인 활동을 활발히 했어요. 현장의 노동운동가 출신으로서 노동운동에 관한 강의를 나가기도 했어요. 사내에서는 현장활동가모임의 대표를 맡아 노조임원선거 출마하기도 했죠. 이렇게 누구보다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다양한 대외활동을 하며 활기차게 살아왔어요. 그런데 2008년 투쟁 이후 지금까지 벌써 10년 째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고, 그에 따른 부작용, 아픔을 묵묵히 감내하고 있어요. 특히 만성적인 두통은 남편을 가장 힘들게 해요. 앞으로도 계속 이런 상황이라면, 앞으로 이걸 더 어떻게 버텨야하나, 막막해요." - 남편이 괴롭힘을 당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2009년 1월 17일 심야 24시 경, 사내하청OO기업 복직연대투쟁이 한창이던 농성장(사외 현대미포조선 담장 옆)에 오토바이헬멧으로 복면한 현대중공업 산업보안팀이 쇠파이프, 각목, 소화기로 무장하여 당시 농성장을 지키던 남편과 진보정당 당원 5~6명가량에 무자비하게 심야 테러를 가했어요. 당시 현장에는 울산동부경찰서 소속의 전경과 경찰관이 50여 명 가까이 있었지만 이들은 현대중공업 산업보안팀의 테러행위를 방관했어요. 남편 말에 의하면 남편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기 전 일부 전경들이 현대중공업 산업보안팀에 폭행당하는 것도 보았다고 했어요. 당시 남편은 경비대로부터 소화기와 각목, 쇠파이프로 가격 당해 의식을 잃고 응급실에 실려갔고, 이후 1년 간 병원치료를 받았어요. 이 사건 이후 저는 남편과 함께 약 3년 간을 서울과 울산을 오가며 현대중공업 산업보안팀의 심야테러와 울산동부경찰서의 직무태도에 문제제기 했어요. 이후 국회진상조사단이 꾸려지며 이 사건에 대한 국회진상조사가 이루어지고 경찰청과 울산지방경찰청을 상대로 국정감사를 진행하는 등 이 사건에 대한 문제제기는 계속되었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권기였던 당시,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어요. 10년 만의 정권교체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몇달 전 국회의원 출신 조승수씨와 노옥희 울산광역시 교육감을 만나 지난 2009년 1월 17일의 현대중공업 경비대 심야테러 사건을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에 올리기 위한 협의를 가졌다고 했어요. 그리고 남편과 저에게 자료를 준비해달라고 했고 저는 자료를 보내주었어요. 하지만 새 정권이 들어선 이후, 과거에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과거사들이 너무 많은 관계로 저희 사건이 조사 대상으로 채택 될지는 상황을 계속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남편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첫째, 2009년 사내하청노동자들의 복직투쟁을 도운 것과 ▲둘째, 그 과정에서 벌어진 현대중공업 산업보안팀이 저지른 심야테러 해결 ▲셋째, 경찰의 심야테러 방관에 대한 문제제기 해결을 위해 3년 간 서울과 울산을 오가며 싸운 일들에 대한 보복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 남편이 다니는 현대미포조선에 하고 싶은 말이 있으세요? "2013년 11월 26일, 남편과 회사 간 합의서 내용을 보면 회사가 남편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상세히 서술되어 있어요. 세계 제1의 중형선박 건조를 자랑하는 대기업에서 노동자를 향해 이런 상식 밖의 행위를 일삼았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더구나 성숙한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한국사회에서, 이렇게 비민주적인 행보를 보이는 것은 회사 경영진들의 수치가 아닐까요. 20여년간 무분규·무쟁의에 가려진 노사관계의 민낯이 이제는 제대로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남편을 이 지경으로 만든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고, 재발방지대책을 내놓기 바라요." -남편이 당한 심야테러 관련해서 현대중공업과 경찰청에 하고 싶은 말이 있으세요? "저와 남편은 3년간 울산지방경찰청과 서울 경찰청을 상대로 현대중공업 산업보안팀 심야테러가담자 구속수사를 요구했어요. 심야테러 당일 현장에 상주해 있었던 울산동부경찰서 소속 경찰병력 50여 명의 방관적 태도에 문제제기를 했고요. 현대중공업 최대주주 정몽준씨에게도 심야테러와 관련해서 도의적 책임을 요구 했고요. 또 국회진상조사, 울산지방경찰청 국정감사, 경찰청국정감사에서도 문제제기 되었고요. 하지만 결과는 한마디로 무(無)예요. 반대로 만약 남편이 이런 일을 저질렀으면 해고되고 무기징역을 받았을 것입니다. 경찰은 경찰답게, 대기업은 대기업답게 똑바로 처신하라고 충고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세요? "근로복지공단에 한마디 하고 싶어요. 남편은 10년째 약물과 정신력으로 일상을 버티고 있어요. 현재 재요양을 시작한 지 2개월 정도 됐어요. 재요양기간을 정해주는 건 근로복지공단이잖아요. 10년째 이어진 병세가 수개월 만에 나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번에는 충분한 시간을 주기 바래요. 최소한 약물을 어느 정도 줄일 때 까지만이라도요. 근로복지공단이 진정 노동자 복지를 위한 곳이라면, 노동자의 입장에서 최선의 역할을 다해주었으면 좋겠어요. 저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남편의 건강 훼손으로 엉망진창이 된 가족의 삶을 되찾는 거예요. 남편의 건강이 저와 두 딸에게는 삶의 희망이니까요. 그리고 한 가지 더는 비정상이 정상을 지배하지 않는 세상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인터뷰 하는 동안 내내 한미선씨 또한 정신적으로 무척 힘들어했다. 2012년 6월 7일, 김석진씨는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남영동대공분실에서 열린 '87년노동자대투쟁 25주년 기념 제8회 박종철 인권상 시상식'의 수상자로 선정된 바 있다. 그는 오랜 현장경험과 노동운동의 원칙을 고수한 덕에 현장의 노동권 향상을 위한 실천을 지속할 수 있었고, 특히 현장에서 가장 소외된 주변부인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스스럼없이 연대하는 데 앞장서왔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정규직화도 그가 이룬 성과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현장에서 노동자 김석진에게는 인권이 없었다. 웃음도 많고 화통하던 그는 언제부턴가 웃음을 잃었다. 웃음 대신 걱정과 불안이 많아졌다. 지금은 그저 수면장애와 두통없는 일상을 보내고 싶다는 김석진씨. 그의 가족과 함께하는 평범한 가정에서의 행복한 일상은 언제쯤 가능해질까? |